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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었다.
그날도 동아리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예전 같으면 선을 만나기 위해 일찍 기숙사를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가을도 끝자락에 들어서면서 아침에는 꽤 쌀쌀해졌다.
나는 추위를 핑계 삼아 이불 속에서 늦게까지 뭉그적거렸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불 속에서만 뒹굴고 싶었다.
하지만 동아리에서 중요한 안건을 다루는 날이었다.
부회장인 내가 빠질 수는 없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단단히 여미고 기숙사를 나섰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수원역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선도 수원역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게으름을 피운다고 피웠지만, 습관은 무시할 수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무심코 선이 탄 버스가 오는지 살폈다.
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맨 뒷자리에 앉아 버스 뒷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선이 탄 버스가 도착했다.
선이 버스에서 내렸다.
그때 선이 내가 탄 버스를 발견했다.
선은 버스를 잡으려는 듯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버스는 그대로 출발해버렸다.
선이 동아리 장소로 가는 버스 번호를 보고 뛴 것인지,
아니면 버스에 탄 내 모습을 보고 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뒷창문 너머로 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버스는 다음 정류장을 향해 출발했다.
동아리 장소에 먼저 도착한 나는 회원들과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선이 조금 늦게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이 나를 보며 말했다.
“버스를 놓쳐서 늦었어. 미안해.”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리를 둘러보니 어쩌다 보니 내 옆자리만 비어 있었다.
선은 그 자리로 와서 앉았다.
“안녕.”
선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선을 보지 않았다.
“자, 다음 안건은…….”
나는 그대로 회의를 이어갔다.
잠시 옆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이 무슨 일인가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의 자료를 내려다보며 다음 안건을 설명했다.
이후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회의가 끝난 후 선이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근데 왜 나를 안 보고 이야기해?”
“어…… 아니, 뭐…….”
나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 좀 바쁘네.”
괜히 서둘러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자리를 떴다.
나는 자리에서 벗어나 동아리방 밖으로 나왔다.
잠시 복도에 서 있었다.
괜히 나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시 들어가기도 어색했다.
잠시 후 동아리방으로 돌아갔지만 선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회원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도 더 이상 내게 묻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웃기도 했다.
나도 회의가 끝난 뒤 남은 이야기를 정리하고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자꾸 선이 신경 쓰였다.
내가 선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선도 나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그 생각이 들자 또 선을 바라보게 됐다.
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른 회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임이 끝날 무렵 나는 다른 회원들과 먼저 나가려고 했다.
평소라면 선과 함께 버스를 타고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동아리 장소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정류장에 도착하고 보니 선도 그곳에 와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버스가 오는 방향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선이 옆에 섰다.
“오늘 왜 그래?”
나는 선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뭐가?”
“아까부터 이상하잖아.”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선은 더 묻지 않았다.
버스가 도착했다.
선이 먼저 올라탔고 나도 뒤따라 올라갔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자리가 몇 개 남아 있었다.
예전 같으면 자연스럽게 선 옆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했다.
잠시 후 앞쪽에 앉아 있던 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2026.10.08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