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노란색으로 기억되는 봄
대학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동기들과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편하게 지내게 된 여자 동기가 한 명 있었다.
그 아이는 나와 인근 도시 출신이었다.
같은 지역에서 왔다는 것 때문이었을까.
처음부터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 아이는 털털했다.
말투도 행동도 꾸밈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여자 동기들과 있을 때보다 그 아이와 함께 있을 때가 편했다.
내가 수학을 어려워한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이 보던 참고서를 빌려주기도 했다.
참고서 한 권을 빌려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나는 그 일이 고마웠다.
우리는 친한 동기들과 함께 어울려 다녔다.
점심을 같이 먹기도 했고, 수업이 끝난 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아이도 늘 그 무리 안에 있었다.
특별히 둘만의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아이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 아이가 보이면 반가웠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 뒤에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함께 걸을 때면 알 수 없는 설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친한 친구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그 아이가 집에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통화를 마친 뒤 자기 엄마와 통화를 해보라며 갑자기 수화기를 내밀었다.
나는 당황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수화기를 받아 인사를 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장모님, 안녕하세요.”
그 아이는 옆에서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장난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꽤 당황스러웠다.
그런 작은 일들이 쌓이면서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노란색 옷을 즐겨 입었다.
봄날의 캠퍼스에는 개나리가 한창 피어 있었다.
노란 개나리 사이로 노란 옷을 입은 그 아이가 걸어가는 모습은 이상할 만큼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지금도 그 아이를 떠올리면 노란색이 먼저 생각난다.
아마 그때의 봄이 노란색으로 기억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나에게 레포트를 부탁했다.
나는 써주겠다고 했다.
레포트를 다 작성한 뒤 도서관 앞에서 만나 전달하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도서관 앞에서 그 아이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조금 늦는가 보다 생각했다.
몇 분이 지나고, 또 몇 분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시위 행진 소리였다.
나는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 아이였다.
그 아이는 시위 행진 무리 속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서운했다.
나는 약속한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그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진하고 있었다.
‘나한테 말이라도 해주지.’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이에게 화를 낼 만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왜 그렇게 서운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섭섭하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 아이를 다른 동기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뒤로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특별히 다툰 것은 아니었다.
서로에게 서운하다고 말한 것도 없었다.
그저 각자의 생활이 달라지면서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나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 아이도 자기만의 생활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같은 과의 동기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친했던 친구와 조금 멀어지는 것은 대학생활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보이면 반가웠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마음이 설렜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도서관 앞에서 그렇게 오래 기다렸던 내가 왜 그렇게 서운했는지.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저 스무 살의 어느 봄날,
노란 옷을 입은 한 여자 동기가 개나리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 아이가 좋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2026.10.05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