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o Writer
계절 사이로 네가 왔다

42

첫눈

첫눈의 삽화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 사이로 겨울의 어둠이 일찍 찾아들고 있었다. 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이 어둑한 하늘 아래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서로에게 하지 못한 채 남겨 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 나 아팠을 때 찾아와 줘서 고마워. 죽이랑 약까지 챙겨 주고.”

나는 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몸도 안 좋았을 텐데, 나 때문에 일부러 와 준 거잖아.”

“아니야. 아픈데 혼자 있으니까 걱정돼서 그랬어.”

“그래도 고마워. 네가 와 준 덕분에 좋아졌어.”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동안 어디 갔었어?”

“그냥.”

선은 짧게 대답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혼자 아팠던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늘 곁에 있다는 이유로 가족의 소중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문득 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족보다 자신의 삶을 먼저 돌아보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선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어쩌면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 때문에 며칠 동안 혼자 누워 있었잖아. 그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어.”

“아프고 나니까 가족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네가 가족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어.”

선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 그동안 혼자 있으면서 네가 예전에 내게 했던 말을 생각해 보았어.”

선은 잠시 말을 멈췄다.

“나한테 가족보다 내 삶을 먼저 돌아보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라고 말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어.”

선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때는 무척 당황스러웠어.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거든.”

선은 잠시 앞을 바라보았다.

“나는 늘 가족을 먼저 생각했어. 그런데 네 말을 곱씹어 보면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도 생각하게 됐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직 모든 답을 찾은 건 아니야. 그래도 이제는 내 길을 찾아가고 싶어.”

선은 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정말 고마워.”

아니, 내가 더 고마워.

나도 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그리고 더는 마음속에 담아 두고 싶지 않은 말을 꺼냈다.

“나 너 좋아해.”

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내 마음을 전한 것이 선을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닐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나는 조심스럽게 선의 손을 잡았다.

선도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선의 온기가 전해졌다.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순간, 손등이 차가워졌다.

하얀 가루 하나가 손등에 떨어지더니 녹아 사라졌다.

눈이다.

첫눈이다.

우리는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환하게 웃었다.

손을 맞잡은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2026.10.13 발행

이 이야기는 어땠나요?

당신의 기억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