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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사이로 네가 왔다

21

선의 부탁

20화 대표
20화 대표

선과 나는 한동안 예전처럼 지내지 못했다.

서로 말을 걸지 않았고, 마주쳐도 짧게 인사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다.

어느 날 동아리 모임이 끝난 뒤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선이 내게 다가왔다.

“저기…….”

나는 선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터라 선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반가웠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면서도, 선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선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한데,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나는 잠시 선을 바라보았다.

“무슨 부탁인데?”

선이 말했다.

“사실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너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쪽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한동안 나를 멀리하던 선이 다시 나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선이 나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이 좋았다.

“뭔데?”

“할머니가 시골에서 쌀을 보내주셨어.”

선의 할머니가 시골에서 쌀을 부쳐주신 모양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택배기사가 집까지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었다.

쌀이나 큰 짐은 영업소로 보내졌고, 받는 사람이 직접 찾아가야 했다.

선은 쌀이 영업소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택시를 타고 가면 편했지만, 당시 우리에게 택시비는 쉽게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직접 영업소까지 가서 쌀을 가져오기로 했다.

영업소에 도착한 우리는 미리 준비해 간 캐리어에 쌀을 넣었다.

처음에는 캐리어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끌어보니 생각보다 무거웠다.

선과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번갈아 잡았다.

조금 걷다가 힘이 들면 서로 바꿔 잡았다.

선의 집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3킬로미터쯤 되었던 것 같다.

걸어도 걸어도 집은 보이지 않았다.

캐리어는 무거운 쌀의 무게 때문에 길의 작은 턱을 지날 때마다 덜컹거렸다.

“이거 괜찮을까?”

선이 캐리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괜찮겠지.”

나는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이 말했다.

“내가 할게.”

“아니야. 내가 할게.”

“너 힘들잖아.”

“너도 힘들잖아.”

선이 웃었다.

“그럼 같이 들자.”

우리는 캐리어 손잡이를 함께 잡았다.

한 사람이 앞에서 끌고 다른 사람이 뒤에서 밀었다.

조금 전보다 캐리어가 잘 움직였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걸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가끔 길을 확인하고, 캐리어가 덜컹거리면 멈춰 세웠다.

그러다 다시 걸었다.

걸을수록 선의 집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선과 나 사이의 거리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한동안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가 다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선이 내게 부탁을 했던 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부탁 덕분에 우리는 다시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그날 우리는 무거운 쌀을 싣고 선의 집까지 꽤 먼 길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동안, 멀어졌던 우리 사이의 거리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2026.10.07 발행